(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요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요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흔히 생각하는 '복', 번영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민중의 삶은 아주 고단하고 가난했다.
그 삶이 너무 힘들어 메시아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재의 삶을 채워줄만한, 내 인생을 내어주었을 때 나의 필요를 충족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
문제는 이것이 민중들만의 의식이 아니라 제자들마저 이리 생각했다는 것이다.
40 데나리온이나 88 만원이나, 의식주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인생들이 그 시절과 닮지 않았나.
그런 1세기 민중들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하여 예수님의 영광이 가리지 않는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그가 말씀하신 영광의 때는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하실 때이다.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의 영예와 찬란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고난받아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이 영광.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늘 고난이 있다던가, 고진감래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에 순종하다 받는 고난이 가치있다는 의미이다.
회사를 다니다보면 불법적인 일을 반드시 해야하는 업무도 있다.
모든 사람이 쉽게 이를 무조건 피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제자들의 삶의 자세
미워하라는 것은 증오하고 혐오하라는게 아니라 덜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 앞에 하나님을 두라는 의미이다.
인생의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무거이 여기고 영화롭게 하라는 것이다.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제자는 인생의 영광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그 곳에 함께 머무는 걱.
위치 선정이 탁월해야 좋은 제자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그 위치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며 요구하시는 그 곳에 위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실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비천하고 수치스러워보일수 있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고 함께 추구하는 것이 진정 영화로운 길이다.
누구나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간다.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평생 헛된 행위를 부여잡고 살지 않도록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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