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한계라는 절망에 부딪힐 때 신적인 존재를 찾게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숨쉬듯 기도하라.
(느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느폐미야는 포로, 그 중에도 조금 특별한 포로였다.
바벨론에 유다가 망할 때 끌려간 이가 아니라 포로 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이미 유다가 망한 지 100여년이 지난 시기였고, 포로 반환전은 3차까지 진행된다.
그 중간에 제국의 패권이 바뀐다. 바벨론을 페르시아(바사)가 집어삼킨다.
이 바사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삼키며 놀라운 조치를 내린다.
역대하 36:22-23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해방: 3차에 걸친 귀환.
처음 돌아간 사람이 스룹바벨. 그가 성전을 건축한다.
두 번째 돌아간 자가 에스라.
처음 돌아간 사람이 스룹바벨. 그가 성전을 건축한다.
두 번째 돌아간 자가 에스라.
에스라 1:1-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느혜미야는 이보다도 더 뒤.
이렇게 귀환했던 포로들중 하나가 돌아온다.
(느1: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바벨론 침공이 아니라 돌아가 성전을 건축할 때의 일이다.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들의 귀환을 마뜩찮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한다.
이 환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느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기도라는 행위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기도의 본질과 여타 종교의 기도의 본질이 다르다.
기도는 미지의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느1: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정확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의 기도.
1.5세대인 그가 어찌 이리 정확한 지식을 갖고 기도할수 있었을까.
바벨론에 붙들려있는 중에 선지자들을 통해 많은 성경이 쓰여졌다.
포로로 붙들린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흔들리고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휩쓸려 거의 무너지고있을 때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들을 쓰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책이 열왕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는다. 말씀을 떠난 결과다, 말씀을 버린 결과이다- 하고.
결국 이 민족이 다시 회복할수 있는 방법이 말씀이라는 자각 속에 회당이 만들어지고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생겨났다.
다시 말씀으로 복귀한다.
이런 신학의 유산을 계승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할수 있었지 않을까. (혹은 창념? 어느 의미인지?)
(느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조상들의 죄륽 ㅣ록된 성경을 통해 깨닫고 이렇게 기도했다.
내 죄라는 역사의식. 역사인식은 반드시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어있다.
성경적으로 바로 서있으면 자연도 마음대로, 함부로 사용할수 없다.
역사인식은 공동체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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