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흘러간 이야기/성경 이야기

요한복음 11:29-44/ 위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하나님께 실망해본 경험이 있는가.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의 기다리심이 나에게만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실망하고 원망해본 경험이 있는가.
그 실망가운데 습관처럼 예배의 자리만 지키고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필립 얀시
1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2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3 하나님은 숨어계시는가
ㅡ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는 질문 세 가지.

세상에는 부조리한 일이 많고 올바르지 않으며 불평등한 일이 많다.
이에 하나님도 불공평한 분이 아닌가 의문을 품거나 그의 침묵을 힘겨워하기도 한다.
들어줄듯 응답이 늦어질 때, 기도를 들어주시는것같지 않을 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그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계시긴 하는건지, 계시다면 왜 이리 숨어계씨는지. 그런 의문이 들 때 하나님에 대해 실망한다.

본문에도 자신에게 닥친 감당키 어려운 상황 가운데 마리아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요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요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울며 그 앞에 나와 한탄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면 나사로의 병을 고칠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예수님을 찾았으나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죽고 나흘이 지나서야 베다니에 도착하셨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실망한 상태이며 원망하고 있다.
왜 내가 찾을 때 오지 않았느냐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그저 2천년 전에만 보인 장면이 아니다.
나의 기다림이 너무 길어 지치고 실망한 우리의 모습이 여기 있지는 않은가.
그를 믿고 무언가 해주시기를 기다렸는데 응답되지 않은 것에, 기다리다 지쳐 실망하고 원망하지 않았나.
가족이나 친구에게 갑작스러운 병이 찾아오거나 먼저 떠나버렸을 때.
기도해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 전도하지 못하거나 진로가 열리지 않는 여러 상황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나.

혹은 원망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리아가 원망할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의 친미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거나, 응답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느끼며 원망조차 하지 못하고 넘겨버리지는 않는지.

(요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울며 한탄하는, 원망하는 마리아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부르며 그 앞에서 원망하는 이와 함께 눈물흘리신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곧 예수님은 나사로를 되살리신다. 제자들에게 이곳으로 오자 이야기하면서도 나사로가 잠들어있으니 깨우러가자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살리려는 계획을 품고 베다니로 오신 것이다. 그럼에도 절망가운데 우는 마리아를 보며, 그와 함께한 사람들을 보며 나무라지 않는다.
믿음이 없다며 야단치지 않는다. 혹은 그들의 슬픔을 하찮게 여기지도 않는다.
절망가운데 우는 이들을 보며 함꼐 울고 공감한다.

우리가 낙심하고 넘어졌을 때 하나님이 어찌 반응하실것인가.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에 대해 어찌 말씀하실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공감해주신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우리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한다고, 뭔가 더 해야한다 느낄 때가 많다.
함께 울어주는 존재에 대해 어색해할 때가 많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 플로이드 맥클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육신의 아버지에게 경험한 이미지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왜곡시킨다.
"상처는 치유되어야한다."

땅의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 그 친밀감이 하늘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의 토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엄격하고,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노력하가 엄격히 대하는 분으로 여겨지곤 한다.
혹은 무능한 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분으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하고 하나님께는 별게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특히 한국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버지의 이미지가 과묵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것으로 많이 남아있다. 때문에 하나님은 진지하고 진중하고 엄격 근엄하고 뭔가 살갑게 다가가거나 우리의 감정을 들으며 대화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잘 차려입고 격식을 차려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시간과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 우리에게는 본문에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 공감하고 아픔을 알아주며 함께 울어주는 하나님은 낯설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찬식에 공감하며 우리의 세밀한 소이게 귀기울인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책망하거나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의 약함과 분리를 견디지 못하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대신 죽을만큼 사랑하셨다.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며, 다가와 우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위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신다.
결코 우리를 아픔 가운데 던져두고 그를 바라보지 않으신다.

단지 위로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다.
그 문제 자체를 변화시키며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나사로의 부활은 그 자리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병자를 고쳐주시는 정도를 기대했을 뿐, 누구도 죽은 이를 살리리라 기대하지 못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과정은 그들이 원치 않고 불편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불편하고 이상한 과정이다.
당시의 무덤은 동굴에 시산을 안치하고 입구를 큰 돌로 막는다.
그 막아둔 돌을 치우라 이야기하시는데, 이미 시취가 나고있다.
나흘간 안정된 것은 무덤만이 아니다. 그를 잃고 애통하던 마음들도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함께 울고 체념하고 답답해하며 죽은 그를 받아들이고 상처가 안정되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그 상처를 건드리고계인다. 이게 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절망과 실패를 다시 언급하며 썪은내를 맡게 하는지 이해할수 없다.
바라던 것은 다만 그가 죽기 전에 일찍 도착하시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고치길 원하였다. 내가 아는 방법으로.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대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원망했다.

이미 실패해버린 일들을 다시 건드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다시 거기에 대해 기도하게 하며 문제를 다시 꺼낸다면.
왜 지금와서 이를 건드리느냐, 내가 바랄 때 좀더 일찍 와서 들어주면 되는게 아닌가 원망하지 않을까.

때로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은 이렇게 불쾌할수 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미 포기한 일. 생각조차 하기 싫은 썪은 상처를 건드리신다.
그리고 그 아픔의 장소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키신다.

우리의 삶의 여러 경험 가운데 특별히 우리의 아픔과 상처는 때로는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할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아픔과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동일한 아픔과 상처가 있는 이를 끌어안을수 있고, 그 아픔과 상처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 데이브 기븐스.

그 어려움을 잘 돌아볼 때 그게 나의 비전을 발견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게 삶의 방향과 길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ㅡ TW를 반면교사로 삼아 생각했던 것을 기억할 것.

상처가 단지 상처로 남았다면?
상처를 잘 살피고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그 상처가 회복되었을 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를 돌보는 시간" - 김유비

이미 포기하고, 너무 아파 잊고싶은 기억을 들추고 만지며 회복시키는 과정이 내가 원하는 즐겁고 감사한 길이 아닐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픔들을 그저 버려두고 실패한 부분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최악의 순간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반전의 장소로 변화시키신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 환난이 우리에게 인내를 낳고, 그 기다림과 소망이 더 큰 믿음을 낳는다.
때로 우리를 위해 아픔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즉시 개입하지 않으시지만 그를 기꺼이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애써 참으며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그 침묵은 무시가 아니라 사랑이다.
때로 그 기다림이 너무 힘들 때 하나님을 구하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함께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