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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이야기/성경 이야기

누가복음7:11-17

ep. 슬픔의 나무. 
"슬픔의 옷을 벗어 나무에 걸치라. 그리고 다른 이가 벗어둔 옷을 가져가라." 
이 때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옷이다.

많은 아픔과 슬픔에도 전진할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것이다.
마틴루터: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희망이다. 종자에 대한 희망, 이익에 대한 희망, 농부와 장사꾼.
희망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나인 성의 과부. 독자를 먼저 보내고 아들의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당시 독자를 잃었다는 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경제적 활동이 불가하며 모든 재산의 상속으로부터 배제된다.
이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되는 계층이다.
인간의 힘으로 개선할수 없는 절망.

나인 성의 거대한 죽음의 행렬이 성을 빠져나가고있다.
죽은 사람은 청년이나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마저 죽음이 지배하고 있다.
이 순간 다른 무리들이 성으로 진입한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대비되는 그림 - 

많은 성경속 인물들이 도움을 구할 때 예수님 앞에 엎드린다.
그러나 이 말씀 안의 사람들중 누구도 먼저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절망이 너무 커서 아무 희망도 없으며 변화를 상상할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절대 절망, 영적 죽음에 이른 상태. 반응도 보일수 없다. 죽음은 이렇게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힘을 갖고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영이 죽으면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게 된다.
죽어있는 상태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응하거나 그에게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계시지 않거나 계시더라도 나와는 무관한 분이라 여긴다.
이렇게 영적 죽음은 나의 삶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
늘 예배를 딀고 어찌 살아야하나 알고있는듯 하다.
주님의 일이라거나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 팔을 걷어부치고 달려가곤 했는데 지금은 쉽게 단정짓고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돌봐야할 소외되고 사랑이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한 곁의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고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주님께서 먼저 반응을 보이신다.
극한 절망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이 회복된다.
너무 절망해서 아무것도 기대할수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다.
불쌍히 여기다: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이 단어가 아버지의 마음, 탕자가 돌아오기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할 때와 같은 단어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 죽음에 묶여 소망할수 없고 상화오가 문제 가운데 매몰된 나 자신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계씬 것이 소망이다.

울지 말라 하시고

울지말라 하려면 그 절망의 원인을 제거할수 있어야한다.
누구도 위로할수 없는 상황임에도 예수님은 하실수 있다. 죽음을 멈추고 죽음으로부터 돌아오게할수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게 중요하지 않다, 주님이 찾아오시는게 중요하다.
주니밍 오셔도 감동이 없는게 문제다. 지식이 아니라 영혼이 변화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주님의 임재 앞에 변화가 있어야한다. 주님이 곁에 계시며 위로하고 계심을 알아야한다.
그게 복음이고 살아갈수 있는 힘이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 부정한 일이다. 모두가 놀랐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관에 손을 대신다.
죽음의 더러움의 영향을 받지 않을뿐 아니라 그 세력을 멈출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죽음의 행렬을 향해 STOP이라 하고 계신다. 그가 있는한 죽음이 역사할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눅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여인의 극한 절망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 뿌리를 뽑으신다.
근본적인 치유를 하며 회복시키신다.
그렇기에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찾지 못할 때, 알지도 못할 때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다.

성경은 인간의 근본 문제가 죄라고 한다.
죄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여주는 것이 죽음.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죽음의 권세는 아직도 우리를 붙들고있다.
죄를 지으면 영적으로 죽으며 선한 행동을 할수 없게 된다.
죽은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영적인 질병이 먼저 온다.
영적인 문제들- 감정을 포함한 그 모든 문제가 죄로부터 오고, 그가 육신의 질병으로 연결된다.
세상은 이런 고통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야한다.

문제의 본질을 보아야한다.
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깨달아야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난다 - 수요2와 이어지는듯?

죄의 대가는 쓰고, 결국 스스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함을 살면서 더욱 깊이 깨닫는다.
본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죽음을 이기신것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죽음의 공격에 한없이 무너져 힘이 없음을 알고계신다.
힘겹게, 두려워하며 기어가는 우리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고계신다.

이 과부는 결국 극한 절망가운데 빠져있었다.
남편도 아들도 잃었으나 아무 소망도 없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러나 절망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을 만났다.
소망없음이 하나님이 무언가를 하게하시는, 그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뿐 아니라 아들도 살아났고,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삶의 이유를 알았다.

내가 하는게 아니라 되어지는 인생이 되어야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져야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지한 죄인인가 고백할수 있어야한다.

나의 행위로 살아나는것이 아니라
살려주시는 것이다.